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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베이, 거인의 어깨로 향하는 등산로
서베이(survey)를 잘 해야 한다.
서베이라는 단어는 주로 학계에서 많이 쓰인다. 나도 대학원 생활 동안 본능적으로, 혹은 생존을 위해 서베이를 참 많이 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를 새로 만들기 전에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것들을 샅샅이 훑어보는 작업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뉴턴이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서베이는 바로 그 거인의 어깨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찾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길을 통해, 어떤 거인의 어깨에 올라야 내가 보고자 하는 풍경을 가장 잘 볼 수 있을지 탐색하는 과정인 것이다.

개발의 세계에서도 변함없는 진리
이런 서베이의 중요성은 비단 학문 연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소프트웨어 개발의 세계에서도 이 원칙은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중요하게 적용된다. 당장 간단한 갤러리 애플리케이션 하나를 만든다고 해보자. 혹은 많은 서비스의 기본이 된 구글 로그인을 내 앱에 구현한다고 가정해보자.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프레임워크, 배포 환경 등 플랫폼 조합에 따라 이미 수많은 개발자가 고민하고 검증한 ‘베스트 프랙티스’가 존재한다. 시스템 아키텍처를 설계할 때도 마찬가지다. 시스템의 예상 규모, 트래픽, 데이터의 성격 등 다양한 상황에 맞는 최적의 설계 패턴들이 이미 잘 정리되어 세상에 나와 있다.
이런 기존의 지혜를 무시하고 밑바닥부터 모든 것을 새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이미 잘 닦인 고속도로를 옆에 두고 굳이 험난한 산길을 개척하려는 것과 같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시간과 노력의 낭비로 이어지기 쉽다.

LLM, 서베이의 시간을 압축하다
과거에는 이런 서베이를 하려면 인터넷의 광활한 정보 바다를 하염없이 헤엄쳐야 했다. 운이 좋으면 몇 분 만에 원하는 정보를 찾기도 했지만, 관련된 논문이나 기술 문서를 뒤지고, 여러 블로그 글을 비교하며 10분, 20분, 때로는 몇 시간을 훌쩍 넘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주를 캐내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LLM, 특히 ChatGPT를 필두로 한 대화형 AI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내가 자주 사용하는 Perplexity 같은 서비스는 10분 넘게 걸리던 자잘한 기술적 선택에 대한 서베이 시간을 단 몇 초, 길어야 10초 정도로 줄여준다. 예를 들어 “파이썬에서 비동기 작업을 처리할 때 asyncio와 multiprocessing 중 어떤 경우에 무엇을 쓰는 것이 좋을까?” 같은 질문을 던지면, 관련 정보들을 요약하고 출처까지 제시해주니 판단이 훨씬 빨라진다.
좀 더 큰 그림, 예를 들어 새로운 시스템의 전체적인 구조를 잡기 전에는 Gemini의 ‘Deep Research’ 같은 기능을 활용한다. 과거에는 한 시간 이상 걸렸을 법한 광범위한 서베이를 10분 남짓한 시간 안에 주요 관점과 참고 자료들을 정리해준다. 게다가 이 과정은 내가 직접 시간을 쏟지 않아도 된다. 질문을 던져놓고 다른 중요한 일을 처리하다 보면 어느새 결과물이 도착해 있다. 시간 절약은 덤이다.

모든 것에는 중용이 필요하다
물론, 특히 ‘인디 해킹’처럼 빠르게 실행하고 시장의 반응을 보는 것이 중요한 영역에서는, 때로는 남들이 어떻게 했는지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최근 “레드 오션에 가서 작은 파도를 타는 것이 개인 개발자의 생존 전략일 수 있다”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너무 간만 보다가 기회를 놓치는 것도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다.
모든 것에는 ‘중용’이 중요하다. 서베이는 분명 강력한 도구이지만, 과도한 서베이는 ‘분석 마비(analysis paralysis)‘로 이어져 정작 중요한 실행을 늦출 수 있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 “아, 그때 왜 이렇게 설계했지?” 혹은 “이런 방법이 있는 줄 알았다면…” 하며 지난 결정을 후회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서베이를 하는 습관은 바로 이런 순간들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이미 검증된 길을 효율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더 중요한 문제 해결과 창조적인 작업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LLM은 그 여정을 훨씬 빠르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줄 것이다.